[기고] 예멘 난민 문제의 출발 (상)
상태바
[기고] 예멘 난민 문제의 출발 (상)
  • 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 소장
  • 승인 2018.06.29 18: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아파 후시와 순니파 사우디 간의 전쟁 그리고 경제봉쇄

▲ 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 소장
예멘 난민의 발생 원인

2018년 6월 22일 알샤르끄 알아우사뜨 신문은 “후시(국내언론은 후티라고 표기하나 아랍어 실제발음은 후시)들은 무기를 버리고 알후다이다에서 떠나야 한다”고 쓰고 있다. 연합군은 후시 반군이 국제 인도적 물품이 들어오는 후다이다 항구를 장악하여 연합군과 협상용으로 사용하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6월 27일자 신문에는 후시들이 알후다이다에 있는 병원과 호텔 그리고 주거지역에서 가까운 곳에 전투병을 배치하고 장벽을 세우고 참호를 팠다고 전하고 시민들은 물 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했다.

현재 대부분의 인도주의적 지원은 알후다이다 항구를 통하여 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만일 전투가 발생하여 이 통로를 폐쇄하면 인도주의적인 활동과 식량, 연료 등 생필품 가격에 엄청난 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다. 현재 후시 반군과 정부군 간의 전투가 이 도시의 남부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을 뿐이라고 전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알후다이다 시민들을 위한 구조 물품을 가득 실은 비행기가 아덴에 착륙하여 알후다이다로 수송하고 있다고 했다.

후시는 시아파 하위 분파

후시들은 자이디파에 속한다. 자이디파는 시아파의 하위 분파이지만 신학적 견해는 순니에 가깝다. 이슬람법을 적용치 않은 통치자를 대항하여 무장 투쟁한다. 후시는 1992년 북예멘에서 시작된 ‘안싸르 알라’라는 집단이고 이슬람주의의 종교 및 정치적 무장 운동이다. 안싸르 알라는 시아 무슬림이 주도하고 있고 순니 무슬림도 포함되었다.

후시라는 말은 이 단체의 창단자 후세인 알후시(2004년 사망)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이고 본거지는 예멘의 북서부 싸아다 지방이다. 지금 예멘 북부 지방의 1/3 이상이 후시이다. 자신들은 교리적으로 이란, 레바논, 이라크에 사는 12 이맘파 시아에 가깝다고 주장하고 이란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2004년 후세인 바드르 알딘 알후시가 반란을 일으켰다. 2014~2015년 후시들은 전 대통령 알리 압둘라 살리흐의 도움으로 사나(아랍어 발음은 싼아)에서 정부를 접수하고 예멘의 북부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다. 예멘 내전의 양상은 이란의 지원을 받은 후시와 순니 연합군 간의 싸움이다.

아랍 혁명 이후 정권이양 실패

예멘은 2천 888만의 인구를 가진 가난한 나라다. 예멘 난민이 발생한 첫 번째 원인은 아랍 혁명 이후 정권 이양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아랍 혁명 이후 장기 집권하던 알리 압둘라 살리흐(살레라고 표기하나 아랍어 실제 발음은 살리흐)를 축출하고 강제로 압드 랍부흐 만쑤르 하디에게 2011년 정권이 인계되었다. 알카에다의 공격, 남부에서의 분리주의자들의 운동, 전임 대통령 살리흐의 충성파 군인들의 공격 그리고 부패와 실직과 식량 불안 등이 대통령 하디의 발목을 잡았다.

예멘 북부에서는 자이디 시아파들이 중심이 된 후시 운동이 지난 10여 년간 살리흐 대통령에 대항하여 일련의 반란 행동을 하다가 대통령이 바뀌자마자, 새 대통령이 세력을 강화하기 전에 싸아다 지방의 북부 핵심지역을 장악했다. 새로운 대통령의 과도기 정치에 환멸을 느낀 많은 예멘인들, 특히 새 대통령이 살리흐 전 대통령과 동맹한 것을 알게 된 순니 무슬림들은 후시를 지지했고 결국 2014년 말과 2015년 초에 후시 반군이 수도 사나를 손에 넣었다. 새 대통령은 가택 연금을 당했으나 곧 도망하여 아덴의 남부 항구로 피신하였고 그곳을 임시 수도로 선포했다.

시아파 후시와 순니파 사우디 간의 전쟁

그런데 알리 압둘라 살리흐 전 대통령과 후시 반군 사이에서  6번의 전쟁이 2004년과 2010년 사이에 일어났다. 이때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한 군사개입이 시작되었다. 2015년 3월 살리흐 전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보안군과 후시들이 새 대통령 하디를 몰아내고자 했을 때, 시아파 이란이 군사적으로 지원한다고 생각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 8개 순니 아랍 국가들은 하디 정권의 회복을 목적으로 공중 폭격을 시작했다. 순니 무슬림과 시아 무슬림들 간의 싸움으로 확대된 것이다.

순니 연합군은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의 정보지원을 받았다. 후시는 지역적 고립이 되자 이란과 직접적인 항공 노선을 개방하고 이란의 도움으로 그들 지역의 연료와 전력 설비 시설을 갖추었다. ‘안싸르 알라’의 젊은 리더 압둘 말리크 알후시는 히즈불라(레바논의 시아파)의 리더 하산 나쓰랄라의 설교 내용(부패와의 전쟁, 이스라엘과 서구에 적대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후시의 구호는 “알라가 가장 위대하다. 미국에게 죽음을, 이스라엘에게 죽음을, 유대인에게 저주를, 이슬람에게 승리를”이었다(알아라비야 신문, 2015년 3월 27일).

예멘 경제봉쇄가 난민 확대의 원인

2017년 11월 사우디의 리야드를 향한 탄도 미사일 발사는 사우디 주도의 연합군에게 예멘의 출입과 경제 봉쇄를 강화하게 만들었다. 연합군은 이란이 후시 반군에게 보내는 무기 밀수를 막아야 했다. 그러나 유엔은 이런 경제 봉쇄가 수십 년간 가장 심각한 기근을 몰고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몇 주 후, 연합군이 후시 반군이 장악한 항구에서 출입 제한을 완화했음에도 이미 확대된 경제 봉쇄가 기본 생필품의 물가를 급등시켰고 식량 불안을 가속화시켰으며 기본 서비스가 붕괴되었다.

따라서 예멘인들의 난민의 원인들 중 하나는 사우디 주도의 연합군이 과도한 경제 봉쇄를 한 것이 문제였다. 후시들과 살리흐 전 대통령과의 연대도 깨지고 있었다. 후시 전사들은 수도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하여 작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2017년 12월 후시 반군이 살리흐 전 대통령을 살해했다.

걸프 산유국의 예멘에 대한 경제적 잇속

2018년 예멘의 상황은 더 나빠졌고 연합군 내부에서도 의견 차이가 있었다. 사우디는 하디 대통령을 지원해 왔고, 아랍에미리트(UAE)는 분리주의자들과 긴밀하게 연락했다. 2011년 이전에 예멘 투자국들 중에는 카타르와 UAE가 있었다. 북예멘에서 UAE의 투자를 훼방 놓기 위하여 카타르는 타크피르(타크피르란 알라께 불순종한 자와 알라가 허용하지 않는 일을 한 자 그리고 겉으로는 알라를 믿는다고 하고 속으로 안 믿는 자를 카피르라고 단죄하는 집단) 세력을 이용했다. 북예멘에서 사우디 이외에 가장 큰 활동을 한 나라는 카타르였다. (다음 호에 계속)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