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스승과 제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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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스승과 제자 이야기
  • 조현용 교수
  • 승인 2018.05.15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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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스승과 제자라는 말은 선생님과 학생에 비해서 무게감이 있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인생에서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종종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을 돌이켜 볼 때 한 명씩이라도 찾아뵙는 선생님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물론 그런 버릇을 들여놓지 않아서 끈이 다 끊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과의 인연도 소중하게 이어야 하겠습니다.

<스승>은 어떤 존재일까요? 스승은 늘 내 이야기 속에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경우에는 책을 쓸 때 사실 이게 내 이야기인지 선생님의 이야기인지 분간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스승은 내 속에 늘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스승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라면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제가 가끔 하는 이야기지만 스승이라는 말은 원래 무당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의사(醫師)도 무당이었습니다. 의사에 해당하는 한자어를 찾아보면 무당이라는 뜻도 나옵니다. 원래 의라는 한자의 아랫부분에는 무(巫)가 들어 있었습니다. 무(巫)라는 한자의 뜻을 찾아봐도 의사라는 뜻이 있습니다. 무는 선생님이면서 의사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를 치료해 주는 사람이 스승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무엇을 치료할까요? 질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스스로 찾아보면 알 만한 질문입니다. 그런 질문은 좋은 질문이 아니죠. 그건 직접 찾아봐야 합니다. 좋은 질문은 본인이 아무리 해결하려고 해도 풀 수 없는 질문입니다. 학문의 의미는 그런 겁니다.

예전에는 왕도 무당이었습니다. 신라의 왕 중에 ‘남해 차차웅(次次雄)’이라고 있습니다. 차차웅은 신라에서 마립간(麻立干)이나 이사금(尼師今)과 마찬가지로 왕을 의미하는데 ‘자충(慈充)’이라고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차차웅과 자충은 무당의 의미였습니다. 당시의 무(巫)는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에서 통치자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는 존재이고, 우리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차차웅이나 자충의 발음을 오늘날의 발음으로 바꾸어 보면 스승과 닮아있어 흥미롭습니다.

무당(巫堂)은 묻는 사람입니다. 우연이지만 <묻다>라는 말과 발음도 비슷하네요. 무당이 점치는 것을 <무꾸리>라고 합니다. 무꾸리의 어원은 묻다와 관련이 됩니다. 사람의 물음을 신에게 전달하고 신의 목소리를 인간에게 들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신의 목소리는 진리일 겁니다. 희랍에서는 신탁(神託)이라고 하는 말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신의 뜻을 사람을 통해 전달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신탁이 유명한 신탁이지요. 그렇게 보면 스승은 진리를 찾는 사람입니다. 신의 목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어야 하는 겁니다. 간디는 스스로를 진리를 찾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간디가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한편 요즘 시대에는 스승이 없는 시대라는 말도 합니다. 도대체 스승이 안 보인다는 거죠. 하지만 스승은 찾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예전에도 스승을 찾기 위한 노력은 처절했습니다. 특히 부처님의 경우는 더욱 열심이었습니다. 여러 스승을 찾아다녔고 마침내는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저는 부처의 깨달음에는 그동안 찾아다녔던 스승의 말씀도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분의 스승을 완성이라고 보아서도 안 됩니다. 자신만이 스승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위험한 스승인 셈입니다. 다른 좋은 스승도 찾아보아야 합니다. 지식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닌 지혜를 가르쳐주는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좋은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좋은 스승이 되어야겠습니다. 늘 스승과 제자를 찾아야겠습니다. 생각만으로도 벌써 행복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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