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코리아 패싱’ 용어 사용 당장 중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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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코리아 패싱’ 용어 사용 당장 중단하라
  •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
  • 승인 2017.08.29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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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passing' 정확한 의미는 '한국의 종말' - 의미 알고 쓰는 것이냐

▲ 김동진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

누가 passing 이라고 처음 말했나

몇 달 전부터 난데없이 ‘코리아 패싱’이란 용어가 언론에 등장했다. 몇몇 분들이 ‘코리아 패싱’은 왜곡된 영어라고 지적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코리아 패싱’이 특히 언론인, 정치평론가들 사이에서 외래어로 정착되어가는 느낌이다. 답답하고 안타깝다.

‘코리아 패싱’은 영어 ‘Korea passing’을 말한다. 친절하게도 이 용어가 일본 언론에서 사용한 ‘재팬 패싱’에서 왔다고 배경을 설명하는 언론도 있었다. 미국과 중국의 접촉이 빈번해지며 삼국외교에서 일본이 배제됐다는 뜻으로 일본의 한 기자가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엉터리 영어 퍼뜨리는 정치 평론가 & 언론

‘코리아 패싱’도 북한문제에서 중국과 미국이 한국을 따돌린다는 뜻으로 처음 쓰였다. 심지어 청와대의 발표문에도 이 용어가 사용되더니, 얼마 전에는 어느 유력 정치인에 의해 ‘문재인 패싱’이란 말도 등장했다. 이제는 세칭 유명 교수나 정치평론가, 언론인들이 지식을 뽐내기라도 하듯이 ‘코리이 패싱’을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국적 없는 ‘xxx 패싱’이란 외래어가 들불처럼 번질까봐 걱정이다. 도대체 국민들의 언어생활을 어디로 끌고 가려 하는가?

근년에 들어 사회 곳곳에서 영어를 음대로 적으면서 엉터리 외래어를 생산하며 21세기의 새로운 문맹을 탄생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아름다운 한국어가 밀려나거나 사라지는 현상에 분개하고 있는 판에, 이제는 말도 안 되는 콩글리시를 들여와 영어 음대로 써대는 언론에 분노가 치민다. 그것도 하필 일본 기자의 엉터리 영어를 따라 한단 말인가. 일제 강점기 이래 일본식 언어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있는가. 아직도 잔재가 수두룩하다.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Korea passing’은 영문법적으로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뜻을 대체할만한 우리말이 얼마든지 있다. ‘Korea passing’은 문장이나 단어가 될 수 없다. 정확히는 ‘Korea is being passed over’또는 ‘Korea is being ignored’라고 해야 한다. 이를 줄여서 'Korea ignored(코리아 이그노드)’라고 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이 문제는 미국인에게 물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필자는 ‘코리아 패싱’에 대해 얼마 전 한국 정치인으로부터 ‘코리아 패싱’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고 보도된 미국 고위 외교관에게 ‘코리아 패싱’이 맞는 영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당장 엉터리 영어라고 대답했다.

passing 의 정확한 의미 - 죽는다, 종말, 멸망

또한, 영어 ‘passing’에는 여러 뜻이 있다. ‘죽는다’는 의미가 더 자연스럽게 쓰이기도 한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건국공로훈장(독립장)’과 ‘금관문화훈장’ 두 훈장을 받은 고종의 밀사 헐버트(Homer B. Hulbert)는 1906년 한국이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며 사실상 나라를 잃자 이에 분개하여 책을 저술하였다. 미국의 친일정책도 맹비난한 이 책의 이름이 ‘The Passing of Korea’이다. 이는 대한제국의 사라짐을 뜻한다.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한 데 대한 분노로 지은 이름이라고 저자는 책에서 밝히고 있다. 따라서 미국인들이 ‘Korea passing’을 들으면 ‘종말’이나 ‘멸망’을 먼저 떠올릴 수도 있다.

‘코리아 패싱’은 문법적으로도 안 맞고, 뜻에 있어서도 우리나라 운명과 관련하여 묘한 기분을 들게도 한다. 한글이 세계 최고의 문자라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갑오개혁 훨씬 전인 1891년에 저술하기도 한 헐버트가 한국인들이 ‘코리아 패싱’을 사용하는 것을 안다면 지금 어떤 생각을 할까?

19세기 '피진 잉글리시' 로 역주행

19세기 말 동남아에 ‘피진(pidgin)잉글리시’라는 것이 있었다. 서양인들이 밀물처럼 몰려올 때 동남아인들이 서양인들과 장사할 때 쓰는 영어이다. 물론 문법이 맞을 리 없고 영어를 쓰는 서양인들은 한참을 생각해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코리아 패싱’ 사용이 우리의 언어문화 수준을 피진잉글리시 수준으로 전락시켰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말 훼손하는 언론인들의 반지성적 행태를 고쳐라

우리말은 우리가 스스로 가꾸고 보살펴야 한다. 외래어는 원칙적으로 국립국어원이 사전에 등재한 단어만 써야 한다. 새로운 기술 용어, 상품 등에서 불가피하게 긴급히 외래어를 써야할 때도 꼭 필요한 경우에만 써야 한다. 언론 종사자들은 더 이상 반지성적 행태를 버리고 우리말 가꾸기에 앞장서길 바란다. ‘코리아 패싱’을 대신할 우리말은 많다. ‘한국 따돌리기’, ‘한국 제치기’, ‘한국 배제’라고 쓰면 안 되는가? 더 좋은 말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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