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크메르루즈사령부로 쓰였던 옛 한국대사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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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크메르루즈사령부로 쓰였던 옛 한국대사관 건물
  • 박정연 재외기자
  • 승인 2017.01.26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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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들을 위해 교민역사에 남을 자료들을 보존하자

“나는 대사관 지붕위에 사는 잿빛 비둘기다. 수도 프놈펜이 함락된 지 10여일 후 검정색 무명옷에 붉은 끄로마 천수건을 목에 두른, 난생 처음 보는 군인들이 대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태극기가 휘날리던 대사관 앞은 어느새 공산당을 상징하는 붉은색 국기가 올라가 있었고, 건물 입구 문에는 주캄보디아 대한민국대사관 현판 대신 ‘크메르루즈 공산당 사령부’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그들은 검은 양복에 단정한 넥타이를 맨 공손했던 대사관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의도 버르장머리도 없었다. 말로만 듣던 악명높은 크메르루즈군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총부리를 아무데나 휘두를 만큼 잔인하기까지 했다. 피 묻은 옷을 입고 마치 내 집처럼 들락거리는 권총 찬 자들도 적지 않았다. 중간급 간부쯤 되어 보였다. 

일부 군인들은 정성스레 길러온 화단의 예쁜 꽃들마저 모조리 없애버렸다. 깨끗했던 건물 외벽은 어느새 온갖 알 수 없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으로 온통 물들기 시작했고 지저분해졌다. 군복조차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앳된 얼굴의 또 다른 군인들은 상관이 없을 때는 자기네끼리 노닥거리며, 아무데나 침을 뱉고 눕거나 때론 화단에 함부로 소변을 누기까지 했다.”

이 현장을 지켜본 대사관 지붕 위 잿빛 비둘기 한 마리는 한 숨을 내쉬었다. 이 비둘기는 프놈펜 함락을 불과 10여일 앞둔 어느 날 대사관 직원들이 서류박스를 들고 서둘러 대사관 문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생생히 목격했다. 문을 나서기 전 누군가 자신을 향해 손을 들었다. 마지막 작별인사였다. 그들과는 그렇게 헤어졌다. 비둘기는 수년간 함께 정들어 지냈던 대사관 사람들이 그래도 그리웠다. 하지만 3년 후 쯤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밀려 크메르루즈가 물러난 뒤에도 그들은 결국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 박정연 재외기자

위 글은 당시 프놈펜 함락 당시 피신하지 않고 끝까지 역사의 현장을 목도했던, 한 일본종군기자가 남긴 증언을 토대로 기자의 상상력을 동원해 비둘기의 시점으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본 것이다. 

일본 기자가 남긴 증언에 따르면 주캄보디아 대한민국대사관 건물은 새로 수립된 크메르루즈 공산당 사령부 건물로 사용됐다. 이러한 내용은 지난 2006년, 31년 만에 외교부가 공개한 외교기밀문서(교민비상철수보고서)에도 실제 기록으로 남아있다. 

세월은 어느새 흘러 지난해 12월 드디어 대한민국 국유의 주캄보디아 대사관 건물이 완공됐다. 우리 대한민국의 위상과 국력에 걸맞게 새 대사관 건물이 지어져 가슴 뿌듯하다. 더욱이 올해는 특히 양국이 재 수교를 맺은 지 20년이 되는 상징적인 해이기도 하다. 과거 역사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문득 과거 70년대 우리 대사관 건물이 지금도 남아있는지 궁금해졌다. 대사관 관계자들에게 수소문을 해봤지만, 위치나 주소를 알 수 있는 관련서류나 단서는 찾기 힘들다는 답변만 날아왔다. 대사관직원들마저 긴급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긴박했던 상황 등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프놈펜 시내중심가 어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건물은 어쩌면 내전 중 부서지거나 오래되어 이미 철거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래도 외교부 오래된 서류창고를 뒤져보면 대사관 건물모습을 담은 흑백사진 한 장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미련을 갖게 된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까지 임대해서 사용하던 국민은행 건너편 구대사관 건물은 주인이 바뀌어 인도대사관이 들어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금은 대부분 기억하지만 세월이 흘러 가다보면 이 건물 역시 과거 우리대사관이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는 이가 점점 사라질 것이다. 왠지 서운한 마음마저 든다. 또 어쩌면 반세기쯤 지나면 과거 우리 대사관 건물이 어디 있었지 찾으려는 나 같은 사람들도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까지 미치니, 우리 외교공관이 훗날 우리 교민역사를 되짚어 기록으로 남기거나 그 뿌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후세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과거 사용했던 대사관 건물에 관한 자료들은 물론이고 낡은 사진 한 장이라도 더 꼼꼼히 챙기고 잘 보존해야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요즘처럼 모든 정보를 데이터화하는 시대에 그런 걸 걱정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노파심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메콩강 앞 왕궁을 지날 때면 늘 수백 마리 비둘기들이 하늘을 감싼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잿빛 비둘기 한 마리가 무리를 벗어나 기자의 머리 위를 맴돌더니 다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혹시 방금 전 본 바로 그 잿빛 비둘기가 대사관 사람들이 돌아오길 그리도 기다리던 그 비둘기의 후예는 아닐까?” 

뜬금없는 이런 상상의 나래를 펴다 실없이 혼자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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