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의 아이들 2막 - 11. 아빠들의 학교 사랑
상태바
내 생애의 아이들 2막 - 11. 아빠들의 학교 사랑
  • 김태진 사무국장
  • 승인 2015.07.27 14: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태진 한국문화국제교류운동본부 사무국장(전 맨해튼한국학교장)
  현종이 아빠가 교무실로 들어오신다. 현종이를 학교에 자주 데려다 주시기에 얼굴은 익혔지만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없다.

 
  “현종 is supposed to go to the birthday party of his friend. So, I came here to pick him up early.”
  ‘으응?, 현종이 아빠는 한국말을 못하나?’
 
  보조 학생이 현종이를 데리러 간 사이 현종이 아빠와 대화를 나누었다.
 
  “You don’t speak Korean, do you?”
  “I can understand Korean, but it is hard for me to speak Korean.”
  “When did you come to USA?”
  “I came when I was 3years old. At that time, it was hard to find a Korean school, and there were few Korean people. So, I had no chance to learn Korean...”
 
  그렇게 하여 현종이 아빠와 안면을 트게 되었고, 학교에 오시면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셨다. 그런데 인사하는 모습이 한국식과는 사뭇 다르다. 어느 정도 시선이 마주치는 거리에 오면 손을 번쩍 쳐들며 “Hi!” 라고 말을 한다. 친구에게 인사하듯 하는 그의 모습에 당황했을 뿐더러, 고개를 푹 숙여 정중하게 인사한 내가 멋쩍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후 그 불평등(?)한 인사가 계속 되면서 나도 그처럼 “Hi” 하며 친구처럼 인사할까? 고민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기는 한국학교!, 현종이 아빠도 한국의 문화를 배우며 한국적인 것을 자꾸 익혀야 할 필요성을 느끼며 나는 나의 인사법을 고수하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때부터인가 현종이 아빠도 나를 보면 고개 숙이며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날씨가 좋지요?” 라는 한국말까지 겻들여 가며.
  “오! 한국말 어디서 배우셨어요?”
  “현종이한테서요… ” ​
 
  경인이, 경현이 아빠도 4살 때 미국에 이민 와서 한국말을 할 줄 모른다. 자랄 때는 몰랐으나 어른이 되고 사업을 하면서 한국어를 잘해야 할 필요성을 느낌과 동시에 어려서부터 한국말을 배우지 못한 한(恨)을 가지고 있기에 혹 아이들이 토요일에 자신들이 좋아하는 운동이나 다른 활동을 하고 싶어 해도 한국어 배우기를 일순위에 놓으시는 분이다. 게다가 학교에 기부도 많이 해 주시기에 내게나 학교에게나 너무나 든든한 분이다. 그러던 중 학교 연말 파티에서 참석하셨는데, 아무 말도 안 하시고 한쪽 구석에서만 계셔서 신경이 좀 쓰였다.
 
  “원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말도 많은 편인데 한국 사람들 모임에서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요. 한국어가 서툴러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아이들이 한국학교를 다니며 한국말을 하기 시작하니까 제법 따라하며 본인도 한국말을 많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경인이 어머님은 남편이 한국어를 못해 한국사람 모임을 꺼려한다며, 남편도 빨리 한국어를 잘하고 그 문화에 잘 어울렸으면... 하는 바람을 이야기하였다.
 
  “여보세요? 경인이 어머님 계신가요?”
  “지금 없어요. 밖에 잠깐 나갔어요. 30분 후쯤 있다 올 거예요. 어디십니까?”
  “네, 한국학교입니다. 그럼 30분 후에 다시 걸겠습니다...”
 
  분명 남자 어른의 목소리다. 경인이 집에 남자 어른이라고는 경인이 아빠뿐인데.. 경인이 아빠치고는 발음도 좋고 말도 너무 잘하고... 집에 손님이 오셨나?
 
  “선생님, 전화하셨다면서요? 경인이 아빠가 그러던데...”
  “정말 그 분이 경인이 아버지세요? 저는 한국어를 정말 잘 하셔서 긴가민가 했어요.”
  “이젠 제법 한국어를 해요. 아이들하고 항상 한국어를 하려고 하고, 저하고도요... 결혼 초기에는 영어로 대화를 했는데 지금은 한국어로 대화를 해서 저도 너무 좋아요. 잘 모를 때는 아이들한테 물어보고 그래요. 이젠 쓰기도 하고자 하는데 너무 못하니까 아이들이 놀리죠. 그래도 아빠는 싱긍벙글이에요. 아이들이 일기를 혼자 척척 쓰는 것을 보며 매우 대견해요... 아이들이 한국어 실력이 느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그 행복으로 사는 사람 같아요...” ​
 
  규태, 소희 아버지는 7살 때 미국에 오셨다. 역시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편한 분이다. 어머니는 4살 때 와서 한국어가 더 서툴다. 부부가 꼭 같이 한국학교에 오시며, 한국학교에서는 한국어를 써야 한다며 꾸역꾸역 한국어 대화를 열심히 하신다. 그러다 어려운 표현에서 규태 어머니가 영어를 할 때면 다시 한국어로 가르쳐주실 만큼 한국어에 남다른 정열을 보이는 분이다. 그런 규태 아버님의 한국어에 대한 학구열은 매우 강하다. 어느 때부터인가 한국어를 모르는 학부형이 40%를 넘어서면서 모든 문서를 한·영 이중으로 내보냈다. 규태 아버지는 분명 한국어 편지가 어렵고 무슨 말인지 모르는 부분이 많을 텐데 편지를 볼 때는 꼭 한국어부터 본다. 나는 유심히 그의 얼굴을 살핀다. 잘 모르는 것이 있는 눈치이다. 그러면 뒷장의 영문 내용을 봐도 될 텐데 꼭 질문을 한다.
 
  “교장 선생임, ‘대여’가 무슨 뜻이에요?”
  “네, 빌려준다는 뜻이에요.”
  “으응, 대여... 그러니까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한다. 그러면 맞나요?"
  “네..."
  “아, 감사합니다. 오늘 또 하나 배웠네요. 대여, 대여...”
  “한국어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시네요...”
  “네, 그냥 일상 대화는 그냥 하겠는데 한자어 어려운 것이 참 많아요. 특히 문장 읽기는 제게 너무 힘들죠. 그러나 아이들도 배우는데 저도 배워야죠. 솔직히 중고등학교 때까지는 한국적인 것의 소중함을 잘 몰랐어요.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에 대한 의식도 별로 없었고요. 아마 고등학교 때부터였을 거예요. 카페테리아에 가면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같은 인종끼리 앉아요. 저 자신도 느끼지 못한 부분이었지요. 대학생이 되니 그때서야 분명해지더군요. 미국인 친구들과 다른 무엇이. 그 때부터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의문에 사로잡혔어요. 참 혼란스러웠지요... 그리고 한국인, 한국문화와 한국어에도 관심이 생겼고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늦은 만큼 열심히 한국적인 것과 접했어요. 한국에서 유학 온 친구들 덕을 많이 봤어요. 오랜 간 사귄 미국인 친구보다 한국 유학생들에게 더 친근감이 생기고 그들과 더 자주 어울리게 되더군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이 정말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뿌리가 한국임을 잘 알고, 한국어도 체계적으로 배워서 저같은 혼란을 덜 겪었으면 해요. 그래서 아이들 둘 다 한국학교에 열심히 보내려고요.”
 
  지수, 민호 아버님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민 오셨다. 한국인과의 접촉이 거의 없이 자라서 그런지 생각과 분위기가 1.5세라기 보단 2세에 가깝다. 역시 영어가 편하신 분이다. 3년 정도 늦게 한국학교에 입학했기에 아이들이 적응을 잘 하는지 곁에서 지켜보고 싶다며 아이들이 공부하는 4시간 동안 학교에 상주하셨다. 어머님들은 많은 분들이 학교에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 계속 계시는 분이 많지만 아버님으로는 유일하다. 처음에는 어머님들 틈에 있기가 멋쩍으셨는지 카페테리아 한 쪽에서 혼자 책을 보시면서 옆에서 들려오는 엄마들 수다도 슬쩍 듣기도 하시고, 그것에 지치면 학교 옆 Bagel 가게에서 커피를 마시곤 하셨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아버님도 어머님들의 수다(?) 클럽에 함께 하시면서 함께 어울리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부족했던 한국어 실력도 늘리고 한국적 마인드도 배우면서 아이들뿐만 아니라 당신도 한국학교를 제대로 다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씀하신다.
 
  “아이들도 처음엔 한국학교가 어색했겠지만 어느덧 한국무용에 어깨와 발의 스텝을 맞추고, “태권!”을 힘차게 외치는 것처럼 저도 이젠 매주 고향에 오는 기분으로 학교를 찾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한국학교는 지루함의 장소가 아닌 아이들과 저와 함께 느끼는 소중하고 편한 장소가 된 것이지요.”
 
  그렇게 학교에 대한 애정을 키워가며 특유의 온유함과 친근함으로 학부모님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시더니 학부모회장이 되셨다. 직장일로도 많이 바쁘실 텐데 학교 발전을 위해 크고 작은 일을 살피는 그 정성과 배려에 당시 새내기 교장이 되었던 나에게 큰 힘이 되어주셨다.
 
  “교장 선생님, 이번 연말에 모두 단합할 수 있는 잔치를 하려고 해요. 마침 현종이 아빠가 좋은 장소를 제공해 준다고 했어요...”
 
  현종 아버지(학부모회장님과 친구사이다)가 직접 설계하고 투자하신 카페를 빌린단다. 그곳은 그 유명한, 세계 최대의 ‘락카펠러(Rockefeller) 센터 크리스마스트리’가 한 눈에 보이는 멋진 곳이다. 화려함이 반짝이는 연말, 그것도 주말 저녁 시간에 그 환상적인 장소가 한국학교 가족을 위해 제공된다는 사실에 많이 감사하고 감격했다. 모두들 그 아름다운 밤을 기대하며 마음 설레어 할 동안 지수 아버님은 학부모회 임원들과 여러 가지 의논을 하며 바삐 움직이시더니 근사한 초대장도 만들어 오셨다. 파스텔 톤 연녹색 바탕에 초록빛 크리스마스트리, 그 위의 금색 장식이 초대장의 품위를 더욱 높여준다. 예쁜 카드라 열어보는 마음 이 더욱 밝아진다. 그런데 카드를 열어보니 온통 영어다.
 
  ‘한국학교 행사인데 한국어가 한 글자도 없다니... 이번은 할 수 없어도 앞으로는 한국어를 넣어달라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의욕적으로 열심히 일해 주시는 분한테 어떻게 말씀드려야 마음이 덜 상하실까?’ 로 고민에 빠져 있는데...
 
  “아이고, 이거 한국학교 카드에 한국어가 있어야지, 영어가 뭡니까?”
 
  규태 아버님의 커다란 목소리에도 놀랐지만 직설적인 지적에 깜짝 놀랐다. 그래도 자신의 의사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미국 문화에 익숙해서인지 회장님은 별로 기분이 안 나쁜 눈치라 다행이다.
 
  “예, 죄송합니다. 한국어로 했어야 했는데 너무 바빠서... 시간에 맞추다 보니 한국어로 바꿀 여유가 없었어요. 회사나 집에선 한국어 잘하는 사람도 없고...”
  “그럼 저한테 전화하시지... 우리 직원 중에 한국말 잘하는 사람 많은데... 팩스하면 한국어로 금방 고쳐서 보내줄 수 있어요. 다음엔 그렇게 합시다. 아니다, 이 기회에 나도 크리스마스 카드 쓰는 것 좀 배워야겠네요. 교장 선생님, 이거 좀 같이 번역해 봅시다”
  “잠깐, 공부는 나중에 하시고요, 봉투에 학부모 이름 쓰는 것 좀 도와주십시오. 아이들 하교하기 전까지 카드를 다 나누어 주어야 해요. 자, 모두들 모이세요”
 
  규태 아버님의 남다른 학구열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학부모들께 볼펜을 나누어 주는 회장님 손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