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공양미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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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공양미 때문이 아니다
  • 조현용 교수
  • 승인 2015.05.2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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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용(경희대 교수, 국제교육원 원장)

  심청전의 이야기는 답답하고 잔인하다. 우선 ‘심학규’라는 이름이 있는데도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심 봉사’라고 부르는 것도 마음이 불편하다. 눈을 뜨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눈을 뜨려면 공양미 삼백 석이 필요하다고 어린 딸에게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참으로 답답하다.(그런 사람이 실제 현실에서도 있다는 게 심청전에 사실성을 더한다.) 물론 그 전에 심 봉사에게 그런 이야기를 전한 스님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불가능한 조건을 내세움으로써 가여운 이들의 좌절을 깊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공양미 삼백 석에 눈을 뜰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청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으리라. 불확실한 결과를 앞에 두고 눈 먼 아버지 곁을 떠나는 마음이 오죽했으랴. 삼백 석을 구하는 대신 자신이 죽는다면 그게 가장 큰 불효라는 것을 몰랐을까? 자신의 죽음과 아버지의 눈을 바꾸는 장면은 잔인하다. 우리도 살다보면 이만은 못하겠지만 잔인한 선택의 장면이 많이 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청이 아버지’는 눈을 뜨게 된다. 그나마 다행이다.(현실에서는 사기극으로 결말이 나는 경우도 많다.)

  사실 청이 아버지가 눈을 뜨게 된 것은 공양미 삼백 석 때문이 아니었다. 만약 공양미 때문이었다면 절의 곳간은 차고 넘칠 것이다. 그리고 돈 없고 눈 먼 사람들의 좌절과 분노는 하늘을 찌를 것이다. 돈만 있으면 눈을 뜰 수 있는데도 돈이 없어 앞을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할까?(현실에서는 이런 일들도 비일비재하다. 돈이 없어서 치료를 포기한 사람들의 절망이 아프다.)

  그런데도 마치 눈을 뜬 것이 공양미 때문인 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절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그런 곳이 많다. 고통과 절망에 비례하여 절과 교회의 크기가 커진다. 사실 청이 아버지가 눈을 뜨게 된 것은 청이의 효심 때문이었고, 목숨까지 내어 놓을 수 있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간절히 바랐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간절함이 믿음이 되었다. 믿음이 기적이 되었다. 

  종교적인 내용을 보면 눈을 뜨게 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신라 향가에도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라는 시가 있는데 이것도 아이의 눈을 뜨게 하려는 어머니의 간절함이 담긴 노래이다. 천수관음(千手觀音)에 빌고 빌어 눈을 뜨게 되는 이야기이다. 앞을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는 생각은 어디에서나 있는 듯하다.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아픔이리라. 눈에 다래끼만 나도 불편하고, 안경만 없어도 답답한데 말이다.

  여기서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만약에 눈을 뜨는 게 좋은 거라면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다 나쁜 게 된다. 신은 왜 앞 못 보는 사람을 만들었을까?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태어난 사람은 저마다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 앞을 못 보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태어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탄생이 문제가 된다. 참으로 어려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왜 눈을 뜨게 해 주었을까? 풀리지 않는 질문이다. 그나마 내가 내린 답은 ‘간절함’이다. 나만의 간절함이 아니라 가족과 주변 사람의 간절함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을 뜨게 하는 사람의 간절함이다. 의사에게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실제로 그런 간절한 마음이 모여서 의학과 과학이 발전하여 왔다. 예전에는 절대로 앞을 보지 못했을 사람이 이제는 앞을 본다. 앞으로도 아프고 힘든 이들의 고통이 덜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픈 것은 잘못이 아니다. 장애는 잘못이 아니다. 두 손 모은 사람들의 깊은 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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