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중화3조당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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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중화3조당의 비밀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5.05.15 17: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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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삼조당의 비밀 

 

▲ 이형모 발행인

“1980년대 이후 남·북한에서 일고 있는 역사 민족주의적 분위기의 확산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중국은 한국의 일부 학자들이 동이족의 수장이라고 주장하는 치우(蚩尤)를 한족의 조상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이미 마쳤습니다.”

  “그 결과가 1992년부터 1997년까지 하북성 탁록현에 건설한 귀근원(歸根苑)과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입니다. ‘귀근원’이란 ‘(중화민족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정원’이라는 의미이고, ‘중화삼조당’이란 ‘중화민족의 3명의 조상을 모신 사당’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시작된 1992년은 공교롭게도 한·중수교가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과연 이것이 우연일까요? 기존에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염제와 황제의 자손’이라는 의미의 ‘염황지손(炎黃之孫)’이라고 일컬어왔습니다. 따라서 염제·황제에 대항해 동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전쟁인 ‘탁록대전’을 일으킨 치우천왕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치우’를 민족의 조상으로 높이려고 하자, 치우를 자신들의 조상가운데 하나로 끌어안아 버린 것입니다. 현재 중화삼조당 안에는 앉은 상태로 5.5m 높이의 치우, 황제, 염제의 상이 있고, 이들을 모두 중화민족의 3명의 조상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중국에서는 황제(皇帝)를 자신들의 정통적인 시조(始祖)로 모셔왔습니다. 그래서 유교에서 이야기하는 도통(道統)도 ‘황제-요-순-우-탕-문왕-무왕-주공-공자-맹자...’로 이어내려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염제를 자신들의 신화적 조상으로 편입하여 스스로를 ‘염황지손’이라고 부르더니, 이제는 ‘치우’까지도 그들의 신화적 조상으로 끌어안기로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우실하 교수가 쓴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이라는 책에서 “귀근원· 중화삼조당 건립과 치우 끌어안기” 부분을 옮겨서 소개한 것이다.

 

  금속제 병기와 돌도끼 바꿔치기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3인 좌상의 뒤쪽에 있는 벽화의 내용이다. 첫 번째 벽화는, 치우천왕의 군대는 돌도끼와 활로 무장하고 있다. 치우천왕 앞 쪽에 염(炎)을 깃발에 새긴 염제의 군대는 금속제 병기로 무장하고, 돌도끼를 들고 있는 치우천왕의 군대와 싸우고 있는 ‘판천대전’의 전투장면이다.

  또 다른 벽화에는 용(龍)자의 갑골문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는 황제의 군대가 금속제 병기를 들고, 돌도끼를 든 치우천왕의 군대와 싸우고 있는 ‘탁록대전’의 전투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상한 일은 치우천왕의 군대가 ‘돌도끼를 들고 있는 것이다.

  치우천왕은 어떤 분인가?

  중국의 사마천은 그의 저서 “사기”에서 “치우천왕은 동두철액(銅頭鐵額)이다.”라고 했다.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졌다는 표현인데 ’철갑투구‘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이 전하는 ’삼성기전 하편‘에도 “치우천왕이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치우천왕은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최초의 금속제 병기를 만들고 사용한 임금으로, 시대를 앞선 ‘선진문명’을 구사한 절대강자이며 한민족은 물론 중국에서도 ‘최고의 군신’으로 추앙되고 있다. 스스로 ‘염제, 황제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던 중국인들이 뒤늦게 치우천왕을 자기들의 조상으로 편입시킨 것은 그들의 지나친 욕심이고 어색한 일이다.

  중국 역사책에는 ‘치우천왕과 황제 헌원’이 하북성 탁록에서 수십 차례 전쟁을 치르고 이윽고 치우천왕이 황제에게 패하여 전사했다고 쓰여 있다. 우리 역사책에는 그 전투에서 전사한 것은 ‘치우비’라는 부장이었고, 치우천왕은 150세가 되도록 산동성과 하북성을 두루 통치했다고 쓰여 있다.

  결국 치우천왕을 자기들의 3분 조상의 하나로 모시기는 하되, 사마천의 사기와 어긋나더라도 ‘치우천왕의 손에서 금속제 병기를 빼앗아 황제와 염제에게 들려주고, 치우천왕은 돌도끼를 들고 있도록 한 것이다. 왜 그래야 했을까?

  치우천왕은 배달의나라 14대 환웅으로 본래 이름은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다. 언젠가는 한(韓)민족들이 반드시 중화삼조당을 찾아와서 치우천왕을 모셔갈 것이 확실하므로 치우천왕은 빼앗기더라도, 돌도끼와 바꿔치기를 해서 그의 금속제 병기라도 염, 황의 것으로 미리 확보해두려는 속셈인 것이다.

  치우천왕과 황제 헌원의 본적 바꿔치기

  끝으로 하나 더 중요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 치우천왕은 동이족의 본거지인 중국 산동성에 ‘청구국’을 세웠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서쪽의 하북성 너머에 황제의 본거지가 있다. 지금 중국의 역사가들은 ‘황제의 주거지가 일정치 않았다.’는 역사기록을 근거로 ‘황제의 주민등록지’를 동북3성으로 옮기고 있다. 동시에 치우천왕은 황제 헌원의 본래 출신지역인 서쪽 지방이나, 아주 멀리 양자강 남쪽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 노림수는 두 가지로 짐작된다.

  하나는 치우천왕과 동이족의 지리적 거리가 멀어져서, 한민족이 자기들의 조상인 치우천왕을 잊고 포기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황제의 본거지를 동북지방으로 비정하면 단군왕검과 어머니 웅녀를 포함한 많은 한민족의 중요 인물들을 황제의 자손으로 주장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 민족이 계속 ‘식민사관’ 세력에 굴종하여 자기역사를 잊고 잠자고 있는 동안 "단군왕검을 황제 헌원의 자손으로 왜곡하는 작업이 끝나면” 북간도가 문제가 아니라 ‘단군의 자손이 모두 황제의 자손이 되고, 우리들이 모두 중국인이 되는 어이없는 시나리오가 완성되는 것이다.’ 
 

단기 4348년 5월 15일 세종대왕 탄신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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