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저편으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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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저편으로 가다
  • 박경란 재외기자
  • 승인 2015.01.14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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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빨간구두' 2회에 이어 3회 '한국의 딸들' 공연

▲'한국의 딸들' 공연 장면

  귓전으로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아련한 선율이 맴돌았다. 음악처럼 특유의 잿빛 하늘이 12월의 베를린 하늘을 에워쌌다. 그 겨울의 12월도 이렇듯 을씨년스러웠을까. 하지만 휘몰아치는 이국의 싸늘함도 이십 대의 체온을 낮추지 못했다. 무거운 트렁크를 끌고 파닥거리는 청춘의 꿈을 백림에 내려놓았다. 그들의 첫 발자국은 1966년 12월이었다.
 
  세월은 더께를 더해 바야흐로 2014년 끝자락. 이미 ‘베를린의 빨간구두’라는 제목으로 성황리에 두 번째 공연까지 마친 그들이다. 시간과 함께 추억의 페이지는 늘어나 기억의 주파수가 많아졌다. 주파수는 기억의 저편에서 부드러운 파동을 이루며 청춘의 손을 잡아끌고 일렁이는 파도를 만든다. 작은 무대 공간은 반세기의 이야기를 담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지난 공연에서 관객들은 공감의 눈물을 흘렸다. 묻혀 있던 기억의 흔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5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관객의 자리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심장을 때렸다.
 
  이번 3회 공연은 지난해 12월14일, ‘한국의 딸들’이라는 제목으로 막이 올랐다. 연습시간은 짧았다. 스텝과 배우들의 건강과 각각의 가족 상황이 발목을 잡았다. 대본 작업 이전에 배우들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인터뷰 시간도 길었다. 대한민국의 누이이자, 딸이었던 그들의 이국의 삶은 가슴으로 들어야만 할 정도로 사연이 많았다.
 
 
  이 연극에서는 파독 간호사인 주인공 순자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파독 당시의 상황을 꼭꼭 씹어 토해낸다. 총 6막으로, 막마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순자의 촘촘한 스토리가 담겨져 있다. 한국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순자에게 독일병원에서의 생활은 이해 불가능했다. 주사를 놓고 환자를 관리해야 할 간호사가 청소를 해야 한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결국, 독일인 수간호사와의 좌충우돌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지고, 언어적 스트레스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이야기들이 양념처럼 배어 나온다.
 
  우리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이야기는 영옥의 삶이다. 순자와 같은 병원에서 일했던 한국인 간호사 영옥은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 향수병 탓인지 현실과 이상을 혼동한다. 독일인 유부남 의사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환상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깊어가는 가을, 정신병동의 병실 창문가에서 흩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영옥을 떠올리면 우울해진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해피엔드로 마감한다. 영옥은 그립던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해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관객을 위안한다.
 
  마지막 6막에서는 배우들의 발걸음이 이색적이다. 모든 세상의 소음을 잠재우기라도 하듯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살아갈 날보다 남아 있는 날이 짧은, 그 미래를 향해 차분히 걸음을 뗀다. 무대 뒤로는 60년대의 고국의 모습과 푸릇한 청춘의 사진이 스크린을 비춘다. 사진의 얼굴들이 꽃처럼 피었다가 다시 배우들의 심장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배우들은 과거의 사진들이 자신들의 내면 가운데 투사되는 것을 목도하며 가볍게 미래를 전진한다.
 
 
  파독 간호사들의 자전적 연극은 2013년 공연을 시작으로 3회째를 맞았고, 올해에도 공연을 준비 중이다.
 
  파독 1세대들에게 이젠 과거만이 아닌, 현재 그리고 미래가 존재한다. 빨간구두를 신고 분주하게 달려왔던 열정의 그들이 이제 차분히 노년의 언덕에서 삶을 귀추한다. 관객 중 누군가 소곤대었다.
 
  “세월에 저항하면 주름이 생기고 세월을 받아들이면 연륜이 생긴다더니…….”
 
  그들에게선 주름이 아닌 연륜이 보인다. 갑자기 목이 메었다.
 
  이 연극을 주도하고 이끈 前 베를린 간호협회 회장인 김금선 씨는 현직 간호사로, 무용 등 예술활동에 전념해 독일 내 한국문화 전파에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연출을 맡은 연극인 강수기 씨와 그의 남편 디히트마 렌츠 씨는 극단 ‘살푸리’를 운영하고 코칭 및 연극활동에 매진하며 이번 작품에서도 대본 각색 등 열성을 다했다. 또한 대본작업에 참여한 박경란 작가는 한국에서 잡지사 편집장을 역임했고, ‘나는 독일맥주보다 한국사람이 좋다’와 ‘베를린 오마주’를 저술했다. 참여한 배우로는 김금선, 김재옥, 김헌숙, 방영숙, 박화자, 이묵순, 조송자, 정유선(가나다 순) 등이다.
 
 
 
  박경란 재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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