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장유유서의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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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장유유서의 오해
  • 조현용
  • 승인 2014.08.2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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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세상이 초고속으로 변화하면서 세대 간의 갈등이 심해지고 있다. 갈등의 핵심은 어린 것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고, 나이 먹은 이의 간섭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둘 다 틀리기도 하고, 둘 다 일리가 있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서로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 생각된다.

나이 든 이들은 요즘 아이들이 위아래가 없다는 말을 한다. 자신이 어릴 때, 자신이 젊을 때는 안 그랬다는 말을 하면서 요즘 젊은 것들은 ‘장유유서’도 모른다고 투덜대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도 요즘 우리 사회는 장유유서가 문제다. 나이 어린 사람의 측면에서도 그렇고, 나이 든 사람의 처지에서도 그렇다.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의미는 ‘나이 많은 이와 나이 어린 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다.’는 뜻이다. 이 단순한 표현의 말이 많은 오해를 불러오는 것 같다. 즉,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늘 윗사람 위주로 생활해야 함을 나타내는 말로 생각하는 것이다. 윗사람은 대접받아야 한다는 의미로만 사용한다. 오늘날 서열 중심의 우리 사회가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 장유유서의 해석을 잘못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권위주의적 문화도 어찌 보면 장유유서의 오해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차례가 있다는 말에 ‘나쁜 일’도 포함되는 것이라는 점을 잊고 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다. 즉, 장유유서라는 말은 윗사람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먼저 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좋은 것은 다 윗사람이 먼저 하려고 하고, 나쁜 것은 다 아랫사람을 먼저 시키려는 태도는 장유유서가 아니다. 장유유서의 시작은 윗사람의 모범에서 출발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모습을 살펴보면 장유유서가 금방 이해된다. 부모는 늘 자식에게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 한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자식의 입에 넣어주고 싶어 한다. 자신은 배가 고파도 자식이 배고파하는 것은 참지 못한다. 자식을 위해서 늘 고민하고, 아파하고, 도와주려 한다. 장유유서에서 윗사람이 가져야 할 덕목을 우리의 ‘부모(父母)’가 모두 보여준다. 자식의 효가 자연스러운 것도 부모의 이런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차례는 배려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윗사람은 늘 아랫사람에게 양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욕심내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아랫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서(順序)’가 생긴다. 형제들 간에도 형은 동생에게 양보해야 한다.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좋은 물건이 있으면 형이 동생에게 양보하는 것이 기본이다. 늘 동생을 배려하면 장유유서는 저절로 된다. 동생이 형을 따르는 것은 형의 위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직장의 상사라는 사람이, 군대의 선임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먼저 챙겨서는 장유유서는 없다. 억지로 따르는 일만 있을 뿐이고, 따르는 척만 하는 것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모욕해서는 장유유서는 없다. 본인의 이득을 먼저 생각하는 윗사람에게 아랫사람이 존경의 마음을 보일 리 없다. 아랫사람이나 후배는 서투른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늘 도와주고, 양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게 장유유서의 시작이다.
 
살면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은 늘 내가 먼저 해야 한다. 내가 속한 조직이 어려울수록 내 살부터 깎아내야 한다. 희생하는 내 모습을 보고 아랫사람이 절로 따르게 되는 것이 장유유서다. 장유유서는 ‘양보와 배려의 가치’다. 그래서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되는 ‘사랑의 가치’이기도 하다. 이 세상이 참된 장유유서의 사회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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